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오쩌둥 사상 (문단 편집) === 농촌 중심 === 얼핏 보면 그냥 노동자를 농민으로 바꾼 것뿐 아니냐 싶지만, '''마르크스는 농민과 같은 이들은 [[쁘띠부르주아]]로서 오히려 혁명에서 반동이 되어 [[프롤레타리아]]를 공격할 위험이 있다고 봤다.''' 근대 이후의 공업이 생산하는 제품들은 기존의 수공업품들에 비해 더 많은 양과 더 많은 작업양을 요구했기에 대규모 공장을 통한 협업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데 비해 농업은 개인이나 가족단위로 이루어질 수 있고, 이 때문에 농민은 자신과 가족이 경작할 땅을 나눠주는 [[토지개혁]]은 지지하지만 그 이상의 사회적 소유관계 재설정은 원하지 않고, 특히 '''농토를 공유화하려는 시도는 자기 땅을 빼앗아가려는 것으로 받아들여서 공장이나 기업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본가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이유이다. 이에 비하면 공장 노동자들은 생산 시설의 공유화에 별다른 저항감을 가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공장이 국가 소유가 되건, 조합 소유가 되건 애초에 자기 것이 아니었고 혼자나 가족끼리 운영할 수 있는것도 아니니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없는 셈이다. 이는 19세기 당시 선거에서도 프랑스를 비롯한 주요국가에서는 농촌이 보수적이고 도시가 진보적인 성향을 띄는 선거결과가 나왔던것에 기인한 것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러한 선거결과나 농촌지역에서의 왕당파나 가톨릭 등의 세력이 큰 세를 얻는 현상을 보고 분석하면서 나온 결론이다. 우파 • 보수적 성향이 주류인 한국에서는 이를 [[여촌야도]]라고 불렀다. 여당이 우파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러시아]]등의 나라에서는 [[농민]]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의지가 높아서 특히 나로드니키 좌파인 사회혁명당 좌파의 노력으로 농민들은 오히려 자발적 협동농장을 지지하는 편이였다. 이는 [[http://docs.historyrussia.org/ru/nodes 26447-pismo-m-a-spiridonovoy-tsk-rkp-b-noyabr-1918-g#cite-ref-1-27-1|마리아 스피리도노바의 편지]]에서도 잘 나타나는 편이다. 때문에 러시아 대부분의 [[농촌]]은 아니었다. 이 점이 [[유럽]]과는 달리 산업 발전이 늦어지고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았던 [[아시아]], [[아프리카]]의 [[제3세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변변히 근대적인 거대 도시라고 할 만한 지역이 없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